주택가격이 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면 매매가 대비 전세가의 비율이 오른다.
매매가가 내릴 수도 있고 전세가가 오를 수도 있다. 현재의 시장처럼 전세가가 크게 오르는 것은 시장에 나오는 임대물량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임대 물량"은 보금자리주택 같이 정부나 대규모 임대사업자들이 법령에 근거해서 추진하는 제도권 임대주택 뿐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임대차계약에 의해 공급되는 셋집까지도 포함한다.
사실 우리나라 임대주택 시장에서 제도권 임대주택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2005년 센서스에 의한 전체 가구수는 1,589만 가구였는데, 자기 집에 사는 사람들은 55.6%, 883만 가구였다.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706만 가구 중 제도권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불과 124만 가구였다. 나머지 582만 가구가 개인 간의 임대차 계약에 의존해서 세를 살고 있었다.
<표> 점유형태별 주택
비제도권이라고 해서 불법이라는 말은 아니다. 정부로부터 금융이나 세제 측면에서 특별한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개인들이 여유자금으로 한 채 이상의 집을 정해지지 않은 기간 동안 세놓는 것을 여기서 비제도권이라고 이름 붙였다.
2005년 센서스 이후에 국민임대주택이나 보금자리주택을 많이 지었지만, 현재 다른 사람이 여분으로 가진 집을 빌려서 주거를 해결하고 있는 가구가 최소 550만, 전국민의 약 3분의 1에 달한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이처럼 엄청난 물량의 집을 빌려주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다주택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자본이득을 기대하기 때문에 전세든 월세든 비교적 저렴한 임대료를 받았다.
집 값이 올라주지 않고 임대료만 받아서는 은행예금만도 못한 수익을 거두게 된다. 이들 다주택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노무현 정부는 다주택자들이 주택을 매점매석해서 가격이 오른다는 시각에서 다주택자 세금부담을 높이는데 진력했다. 종합부동산세 도입, 과표현실화, 양도소득세 중과세 등이 모두 다주택 보유자를 타겟으로 하였다.
세금을 올리면 부동산의 내재가치가 감소한다. 주식이나 채권에 세금을 많이 메기면 이들 유가증권의 가격이 떨어질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원리로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세제가 몇 년 더 계속되었다면 많은 다주택자들이 세금을 못견디어 집을 싸게 팔았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부동산세를 완화해서 그런 사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 대해 아쉬움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그 다음은?”이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다주택자들은 전국민의 약 3분의 1에게 임대주택을 공급한다. 이들이 세금에 못이겨 집을 처분하면, 마침 목돈을 조달할 수 있었던 중산층 무주택자들은 내집마련을 할 절호의 기회를 갖는다.
(이들이 꼭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집을 싸게 사는 대신 세금을 많이 낼 것이기 때문이다.) 한차례 주택의 손바뀜이 있은 이후, 누가 다주택자들 대신 충분한 물량의 임대주택을 공급할 것인가?
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지어서 공급하는 것이 대안일 수 있고, 실제로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정부가 전체주택의 15∼20%를 공공임대주택으로 확보하고 저소득층에게 임대해 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공공임대주택 비중이 낮은 나라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데는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든다.
결국 다주택자들이 수행하던 임대주택 공급자의 역할을 대신할 주체는 없다. 다주택자들이 집을 던지는 때에 목돈을 만들 수 없었던 수백만의 임차자들은 아무데서도 셋집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국민임대주택을 거쳐 이번 정부의 보금자리주택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임대주택을 많이 지으려는 노력을 했지만, 주택 건설은 금방 되는 일이 아니다. 시간도 문제이고 건설비도 문제다.
보금자리주택 공공임대 한 채를 짓는데 정부(국민주택기금)가 지원하는 돈이 7천만원이다. 백만 가구에 임대주택을 공급한다면 지원해야 할 액수가 70조원에 달한다.
다주택자들은 임대주택의 공급자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주택시장의 자율조정 기능도 담당한다. 주택가격이 급등하면 신규주택 건설시장도 호황을 보여 분양경쟁률이 높아지지만, 주택가격이 하락하면 미분양이 증가하여 주택건설 업계가 어려움에 직면한다.
이 시기에 주택에 투자하여 미분양 주택을 사두는 투자자들이 그나마 미분양 해소에 큰 도움을 준다.
이들은 미분양 주택을 사서 임대주택으로 운용하다가 집값이 오르면 시세차익을 거두면서 기존 주택시장에 공급원의 역할을 한다.
주택이 투자의 대상이라는 본질에 눈감고 다주택 보유를 적대시하는 정책은 이런 자생적 주택비축 내지 경기조절 기능이 작동하지 못하게 한다.
다주택자들은 주택을 투자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이해를 도모하는 가운데, 임대주택 공급자로서, 또 주택경기 조절자로서 기능한다.
국민 세금부담 없이 이와 같은 기능이 수행되어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민간에 의한 자생적 임대주택 시장은 적대시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여야 할 대상이다.
월세는 쉽게 구할 수 있어도 전세가 씨가 마른 상황이 대변하듯이 전세는 세입자들에게 유리한 제도이다.
세입자들이 전세의 혜택을 누렸던 것은 지속적인 주택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 덕분이다.
이제 그런 기대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고, 전세의 혜택을 누릴 시간도 짧아지고 있다.
전세를 유지시키기 위해 주택가격을 올릴 수는 없지만, 정부가 나서서 전세의 수명을 줄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주택 보유에 대한 각종 중과세 조치들을 폐지하고 정상 과세해야 한다.
아울러 전세보증금에 대한 과세 계획도 철회되어야 한다.
집 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받아서 예금을 하든 다른 집을 사든 그 소득에 대해 이미 과세가
이루어진다.
여기에 다시 과세하는 것은 이중과세이다.
많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는 다주택자들에게 지원은 못해 줄 망정 불이익을 주려고 머리를
쥐어짜는 모습이 개탄스럽다.